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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소환] 게임의 끝 덧글 0 | 조회 105 | 2020-12-05 03:05:30
하윤  

[경향신문]

공간을 반으로 가르는 네트를 넘어온 공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소년은, 붉은 테니스 코트 위에 대자로 쓰러져 있다. 라켓도 그의 손을 벗어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 게임의 시간, 공과 상대 선수에게 시선을 맞추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그는 코트를 벗어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패자’의 네트 너머 테니스 코트 한쪽 구석에 등 돌린 채 서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본다. 그의 건장한 몸 앞에 서보니, 쓰러진 소년의 왜소한 체구가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살짝 숙인 ‘승자’는 1969년이라고 쓰인 우승 트로피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고 있다. 어디로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에서 승리의 충만감은 읽을 수 없다.

“승자가 패자보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듀오 작가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이 작품 ‘짧은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변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 나의 위치를 검증하고 싶은 갈망, 승리를 향해 불타오르는 목마름 안에서 뛰었지만, 기다려온 성취의 순간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규칙을 만들어 생각과 움직임을 제어하는 장치들 안에서 비로소 즐거움을 느끼는 인류의 현실을 ‘테니스’라는 게임의 장 안에 펼치고자 했다. 그리고 스포츠로 은유할 수 있는 규칙의 세계, 페어플레이를 외치는 이 세계의 공정함을 향해 질문한다. 나의 승리와 나의 패배는, 공정한 게임의 장에서 결정되었는가. 승패는 무얼 위해 존재하는가.

코트 밖엔 휠체어에 탄 노인이 보인다. 반쯤 잠든 그의 늙은 몸에서 삶의 생기를 읽기란 쉽지 않다. 그에게 시선을 옮기는 순간, 게임의 장면은 마치 노인의 과거인 양 뒤로 물러서고, ‘승패’의 시간을 거친 끝에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노인의 쓸쓸함이 코트를 채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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